1화
이곳은 여러모로 희한한 세상이다.
세상 한편에서는 기름을 태우며 작동하는 거대한 엔진과 굉음을 내며 굴러가는 공장이 있고, 다른 한편은 여전히 양털이나 누에에게서 뽑은 비단으로 손수 옷을 짠다.
한쪽에서는 고무 타이어가 달린 자전거와 자동차를 타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길들인 표범, 멧돼지 등을 타고 다닌다. 마법을 쓰는 이들은 인챈트된 검과 화살을 들고 다니고 마법을 쓸 줄 모르는 이들은 화약과 구리 총알을 만들어 사용한다.
이 메이플 월드는 확실히 나누어져 있었다. 인간은 마법을 쓸 줄 아는 인간과 쓸 줄 모르는 인간으로 나뉘고, 마법을 쓸 줄 아는 인간들은 또 다섯 개의 직업군으로 나뉘고, 그들 중 일부는 시그너스 기사단 소속이고, 또 일부는 그냥 독립적인 모험가들이고…… 심지어 아예 요정이나 수인 같은 이종족들도 있다고 한다.
뭐 여튼 엄청나게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 복잡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난 마법을 쓰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런 내가 어떤 신비한 꿈을 꾸게 되고, 그 꿈에서 얻은 신비한 힘으로 모험가로 거듭난다는, 오글거리고 유치한 대뇌 망상이,
“나랑 같이 이 섬을 떠나자.”
그게 지금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이게 내가 어제 찾은 드래곤 알이야.”
난 침대 밑에서 커다란 알을 꺼내 보였다.
알의 모양은 집 앞 닭장의 달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형적인 타원형이다. 하지만 크기는 훨씬 컸다. 내 머리통보다도 크다. 그리고 표면에 신비로운 곡선 무늬가 그어져 있다.
“어때. 진짜라니까?”
“음…”
적당히 넓고 따뜻한 분위기에 내 방. 왼쪽 벽과 천장에 나 있는 커다란 창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그 방에는 나와 피아가 단둘이 있었다.
피아의 얼굴 앞에 드래곤 알을 들이밀자 피아가 알을 자세히 관찰했다. 하지만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게 드래곤 알이라고?”
“응.”
“그걸 너가 어떻게 알아?”
“말했잖아. 꿈에서 엄청나게 큰 드래곤이 나와서, 나한테 이 알을 부탁한다고 말했다니까. 그런 다음 눈을 뜨니 내 품에 이 알이 안겨있었어.”
“에이…”
피아는 전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럴만하다. 우선 우리가 사는 이곳 빅토리아 아일랜드에는 드래곤이 살지 않는다. 바다 건너 리프레 쯤은 가줘야 드래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둘 다 빅토리아 아일랜드 토박이인 나와 피아는 드래곤 알을 본 적이 없다. 본 적이 없으니 이 알이 드래곤 알이 맞는지 구별할 안목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다. 꿈에서 드래곤을 본 다음 꿈에서 깨어나니 정말 내 품에 이 알이 안겨있었다. 그럼 정황상 이건 백프로 드래곤 알 아니야? 난 또 다른 증거를 꺼내 보였다.
“이거 보여?”
그건 처참하게 박살 난 나무 상자였다. 피아가 상자를 대충 훑어봤다.
“이건 또 뭔데.”
“이 알을 얻었을 때 갑자기 내 손등이 알의 무늬 모양으로 빛나더라고. 그 상태로 손 앞에 작은 마나 덩어리가 생기길래 상자 앞에 가져가 봤는데, 콰직 하고 이 상자가 박살 났어.”
“……”
실제로 내 오른손 손등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손등에 알 표면에 있는 것과 흡사한 선형 무늬가 보였다.
“진짜? 마법으로 상자를 부쉈다고?”
“그렇다니까?”
“그럼 지금 한 번 더 해봐.”
“지금…?”
“응. 지금 한 번 더 마법 쓰는 걸 보여줘.”
“……”
난 난처해하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못해.”
“왜?”
“어제는 분명 됐었는데 이상하게 그다음에는 안되더라고.”
내가 마법을 쓴 거 딱 한 번이었다. 이후에는 손등에서 나는 빛도 옅어졌고 더 이상 마법이 발동되지 않았다.
“……”
“어쨌든 마법으로 상자를 부순 건 진짜야! 어제는 분명 마법이 써졌다니까?”
피아가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허탈해했다.
“상자 부수는 것쯤이야… 망치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피아는 내가 보여준 증거들을 하나하나 반박해 나갔다.
“손등에 있는 빛도, 누가 와서 하급 섬광 마법 한 번만 써주면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거고.”
“야! 그렇다고 해도 이 알은 뭔데! 너 이런 알 본 적 있어? 이건 딱 봐도 드래곤 알이라니까?!”
“그냥 드레이크 알 같은데…”
“아오! 너 드레이크 알 한 번도 본 적 없지. 드레이크 알이 어떻게 이런 모양으로 생겼냐!”
“으음… 그래도 드래곤 알이라고 하는 니 주장이 훨씬 말이 안 되잖아.”
“후우…”
난 무거운 한숨을 흘렸다. 그래. 내 업보라고 생각하자. 내 평소 행실이 안 좋았던 탓에 신뢰를 잃은 게 분명하다.
사실 피아 말고도 여러 녀석들에게 이 알을 보여줬다. 하지만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피아는 매일 헐렁헐렁한 곰돌이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여자애이며, 나 못지않게 덜떨어진 녀석이다. 그래서 피아는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번에도 퇴짜다.
피아는 이미 여러 번 들어봤던 잔소리를 늘어놨다.
“빅토리아 아일랜드를 떠난다는 게 쉬운 줄 알아? 마법도 못 쓰는 우리 같은 애들은 나가자마자 개죽음이라니까. 목숨 귀한 줄은 알아야지.”
지금도 피아는 곰돌이 잠옷 차림이었다. 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때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에반! 나와서 마이크 좀 잡아라!”
방 밖에서 날 부르고 있었다.
“응? 에반? 너네 아빠가 너 부르는데?”
피아가 한 번 더 상기시켜줬다.
“아오… 저거 목장일 시키려는 거야.”
“근데 왜?”
“난 목장일 하기 싫어.”
“너 목장일 잘하잖아.”
“그래도 하기 싫어.”
아빠는 내가 목장 일에 재능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형이 아니라 내게 이 목장을 전부 물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난 이 외딴곳에서 돼지들을 돌보며 살고 싶지 않다.
내 방 한쪽 면에는 메이플 월드의 지도가 붙어 있었다. 세상에는 빅토리아 아일랜드 말고도 각종 섬과 대륙들, 심지어는 공중 신전이나 해저 마을 등 갈만한 곳이 널려있단 말이다. 근데 온 평생을 이 촌구석에서 보내란 거냐. 난 그럴 수 없다.
난 큰물에서 놀 거다. 이 돼지 목장은 내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에반! 빨리 나오라니까!”
“……”
아빠의 목청이 높아졌다. 난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이렇듯 난 포부는 크다만 아직은 부모님한테도 찍소리 못하는 청소년.
아직 자력으로 생활비도 마련할 수 없는 세계관 최약체다. 그런 내가 자그마치 드래곤 알을 손에 넣었다. 난 이런 기회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 / / / /
목장 일이 시작되었다. 내가 건초 더미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훅, 훅.”
마이크에 입김을 부니 목장 전체에 걸쳐 설치된 우퍼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마이크에 힘껏 소리쳤다.
“바닥재 교체할 시간이다-! 싹 다 우리 밖으로 나와!”
난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수백 마리가 넘는 돼지들이 모두 내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거대한 우리에서 뒹굴고 있던 돼지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어찌나 많은지 옆에 있던 마당이 돼지로 바글바글하다. 잠시 후 우리는 텅 비었고 옆에 있던 들판에는 돼지들이 땅바닥에 코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녔다.
난 다시 한번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날뛰지 말고 고문고문 있어! 금방 끝내줄 테니까!”
그러자 돼지들이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 얌전히 서서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당연히 돼지들은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다. 근데 우리 목장의 돼지들은 내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듣는다. 남들이 본다면 내가 무슨 마법을 쓰는 줄 알 것이다. 하지만 난 마법을 쓴 게 아니다. 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마법을 못 쓰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내가 돼지들과 소통할 수 있는 거 오로지 내 교감 능력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내겐 돼지와 소통하는 재능이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돼지들은 알아들었다. 심지어 순순히 응해주기까지 했다.
아빠와 형에게는 이런 재능이 없다. 돼지와의 소통은 나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아빠가 나한테 목장을 물려주려는 이유도 이 재능 때문이다.
내 말을 따라 돼지들은 얌전히 들판에 흩어져 때를 기다렸다. 그동안 아빠와 나의 형 유타는 건초 더미를 들고 우리 안에 들어가 깨끗하게 청소하고 새로운 바닥재를 깔아주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노하우가 많은 아빠와 재능있는 나의 협업이라면 이 목장을 문제없이 굴려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미래가 아니었다.
난 큰물에서 놀고 싶단 말이다.
/ / / / /
목장 일이 끝나고 잘 시간이 되었다.
“……”
“……”
난 내 방에서 홀로 누워 있었다. 어두웠지만 눈이 서서히 적응하며 물건들의 실루엣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시계는 10시를 가리킬 때쯤이었다.
고개를 조금만 들면 머리 위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있었다. 난 지금 잠들 생각이 없다. 이미 피아에게는 퇴짜를 맞았지만 한 번 더 설득해볼 생각이었다.
상식적으로 모험가가 동료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아? 내가 볼 때 피아는 동료로 아주 적절하다. 피아가 좀 덜떨어져 보이긴 해도 컨셉은 재미있는 녀석이니까. 같이 모험하면 그 나름대로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피아는 내 알이 드래곤 알이 아니라고 했다. 그냥 쓸모없는 드레이크 알일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드레이크 알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드레이크 알은 이렇게 커다랗지도, 표면에 부드러운 윤기가 흐르지도 않는다.
실물 드레이크 알을 하나 구해와서 비교해주면, 피아를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난 푹신한 이불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달빛이 들어오던 창문을 살짝 들어 올렸다. 어릴 적부터 창문을 넘어서 집 밖으로 나가는 짓은 많이 해봤다. 난 익숙한 움직임으로 창문을 넘어 야외로 나왔다.
난 곧장 슬리피우드로 향했다.
/ / / / /
슬리피우드는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중앙에 있다. 빅토리아 아일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몬스터가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슬리피우드 깊은 곳에 어떤 던전이 숨겨져 있고, 그 속에 강력한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다는 소문이 있다. 소문으로만 들은 이야기라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여튼 난 드레이크를 찾아서 슬리피우드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슬리피우드의 숲은 굉장히 험한 편이다. 나무들이 위로 높게 자라는 엘리니아와 달리, 그곳의 나무들은 옆으로도 넓게 자랐다. 덕분에 나뭇가지와 넝쿨로 이동이 상당히 불편했다. 무성한 잎사귀에 가려 시야 확보도 어려웠다.
괜찮다. 난 어차피 멀리 들어갈 게 아니니까. 드레이크는 슬리피우드 마을 바로 옆에 서식하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거대한 이족보행 도마뱀으로, 몸통에 비해 머리가 매우 크다. 사람보다 큰 키와 뾰족한 이빨 때문에 맹수로 오인되곤 한다. 하지만 겉보기와 다르게 성격은 온순하다. 적어도 지나가는 사람을 선제공격하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모험가들에게 사냥당하는 개체수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좁고 구불구불한 난 길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드레이크 둥지를 쉽게 찾았다.
“크르르… 그르…”
드레이크 한 마리가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잠자리 중앙에는 알이 있을 거로 추측되었다.
드레이크는 온순하지만 산란기에는 예민해지는 특성이 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에 몸을 바싹 낮춰 드레이크 둥지로 기어갔다.
드레이크의 코앞까지 도착했다. 난 팔을 살짝 뻗어 잎사귀로 가려진 알들을 들춰보았다.
“…어?”
그리고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우선 알이 깨져있었다. 알 윗부분이 둥글게 깨져 알 안쪽이 들여다보였다. 알 속에는 드레이크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죽어 있다. 축축한 알 속에 핏줄이 비쳐 보일 만큼 어린 드레이크 태아는 싸늘하게 식은 상태였다.
“왓! 씨…!”
살짝 비위 상하는 모습에 구역질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륵?”
“……”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목소리에 잠들었던 드레이크가 반응했다.
“그르르…”
감겨있던 드레이크의 눈이 떠졌다. 두꺼운 허벅지로 몸을 일으켰다. 높은 키의 드레이크가 날 내려다봤다. 그때 나는 땅바닥에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드레이크의 시선이 둥지를 들추고 있는 내 손으로 움직였다. 동시에 알들이 무참히 깨진 모습과, 이미 죽어 있는 자신의 들을 목격했다.
“아…”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크아아아악-!”
“히익!”
드레이크가 커다란 몸을 벌떡 일으키며 포효했다. 엎드려있던 나와는 체급이 차원이 다르다.
드레이크는 온순하다만 화나면 무섭다. 특히 성격이 예민해지는 산란기에는 아주 조심해야 한다. 드레이크는 산란기에 알을 보호하는 용도로 큰 턱과 이빨을 활용한다. 저 흉악한 턱에 머리를 물렸다간 머리통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어쩌지, 어쩔까, 어쩌긴, 도망가야지.
내가 알기로 드레이크의 달리기 속도는 사람보다 조금 느리다. 전력으로 도망치면 따돌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벌써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드레이크 앞에 지레 겁을 먹어서는, 몸이 제대로 굳어서 당장 일어나기도 어려웠다. 모험가가 되겠다던 놈이 고작 드레이크한테 질겁을 하다니. 이렇게 어이없을 수가 있나.
“어… 어.”
드레이크가 입을 벌리며 다가왔다.
아, 설마 이렇게 죽는 건가. 세계로 나아가고 싶었는데 이 작은 섬도 벗어나지 못하고. 고작 어미 드레이크한테 물려서 죽는단 말이냐. 억울하다. 억울해도 이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눈이 질끈 감겼다. 이왕 죽는다면 고통 없이 죽기를. 하는 생각을 하며 모든 걸 포기했다.
그 순간,
타앙-!
폭음이 들렸다. 이명이 들릴 정도로 강한 그 폭음에 화들짝 놀랐다. 동시에 어떤 뜨거운 액체가 내 안면 위로 튀었다.
“……!”
눈이 번쩍 떠졌다. 내 안면에 묻은 액체를 손으로 살짝 닦아 보았다. 검붉은 빛의 끈적한 액체였다. 난 시선을 올려 방금까지 날 공격하려던 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드레이크는 내 앞에 서 있었다. 근데 머리가 사라져 있었다. 폭발하기라도 한 듯 목 위로가 완전히 뜯겨나갔다. 머리가 없어지며 생명력을 잃은 몸통은 잠시 후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
“……”
쿵, 쓰러지는 소리를 끝으로 숲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된 일인 걸까.
폭음이 들렸던 방향에서 수풀 사이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여전히 굳어버린 상태로 그 고조되어가는 소리에 집중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눈앞의 수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울창한 숲과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이 수풀 사이를 해치며, 어떤 여자가 걸어 나왔다.
“……”
“…누구니?”
그녀가 그렇게 물었다.
그녀의 키는 나와 비슷했다. 근데 자기 키만큼 커다란 총을 들고 있었다. 묵직한 조준경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검은 제복 상의와 맨다리를 거의 다 드러내는 작은 면적의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맨살의 왼쪽 허벅다리에는 작은 벨트가 감겨있고, 그 위에 꽂힌 단검 두 자루가 보였다.
“……”
“누구냐니까?”
뒤이어 두 명이 더 등장했다. 그들은 놀랍게도 사람이 아니었다.
그 둘은 온몸이 짐승처럼 털로 복슬복슬했다. 머리에는 토끼를 연상시키는 기다란 귀가 있었다. 어깨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넓어서 험상궂은 이미지를 주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검은 제복을 입었다. 그러면서 삼엄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건 커다란 토끼 인간이었다. 이외 표현할 방법이 없다.
총 든 여자가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여기서 가까운 마을로 안내해줘.”
“……”
/ / / / /
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걸었다. 토끼 인간 둘과 총 든 여자는 날 뒤따랐다.
짧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다. 온갖 의문들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이 여자애는 누굴까. 왜 마을로 안내하라는 걸까. 드레이크도 이 여자애가 죽인 건가. 뭐 때문에?
얼떨떨해진 상태였던 나는 총을 든 소녀의 요구에 어떤 항의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정직하게, 그녀의 말에 따라 슬리피우드 마을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여자는 결코 내 편이 아니다. 내 편이었다면 저렇게 총구부터 겨누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 총 든 소녀를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것도 확실했다. 결국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마을에 가야 했다. 선택지가 없던 나는 슬리피우드 마을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근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밤이 깊어 날씨가 쌀쌀할 만도 한데, 왠지 모를 열기가 점점 가깝게 느껴졌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정체 모를 붉은 빛도 얼핏얼핏 보였다.
뭐지, 뭘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 의문을 여러 번 되뇌이며 겨우겨우 슬리피우드 마을에 도착했다.
“허억…!”
도착하자마자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마을이 불타고 있었으니까.
잠을 청하고 있을 슬리피우드 주민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무를 파서 지은 주택들은 살벌한 불길을 내뿜으며 타들어 갔다. 주변 숲으로 불이 번져나가며 새까만 연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이게 방금 전부터 느껴지던 열기의 정체였다.
따라오던 소녀가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여기가… 여기가 가장 가까운 마을인데…”
“이미 없어졌네.”
그녀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날 향해 겨눈 총구도 여전히 거두지 않았다.
“그럼 다음으로 가까운 마을로 안내해줘.”
또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거기서 난 확신했다. 지금 대단히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내 뒤에 이놈들도 믿을 수 없다. 오히려 제일 수상한 놈들이다.
언제 저 여자애가 내 뒤통수에 총을 갈겨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떻게 할까. 지금 어떤 행동을 취해야 현명할까.
모험가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헤네시스로 갈까. 거기라면 안전하지 않을까. 아니지. 그 전에 내가 이 여자를 따돌릴 수나 있을까.
그러다 머릿속에 어떤 것이 스쳤다.
목장, 돼지들, 가족들.
아빠는, 엄마는, 형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설마 우리 집이 있는 곳까지 불탔을까. 아직도 집에 있을까. 벌써 도망쳤을까.
하늘을 살짝 올려다보며 고민했다.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타고 남은 재가 바람에 날려 나풀거렸다.
난 이내 결심하고 말했다.
“…따라오세요.”
“응?”
“다음 마을로 안내할게요.”
예전에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연재했던 적이 있는데, 제대로 수정해서 좀 더 길게 연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재는 이틀에 한 번꼴로 할 예정입니다. 근데 한 게시글 당 용량 제한이 있어서 여러 게시글로 나눠서 올릴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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